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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인류무형문화유산 강강술래 공개행사전남 진도군이 오는 19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국가무형유산 강강술래 공개행사를 개최한다.강강술래는 전남 서남해안 일대에 널리 분포 전승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부녀자들의 민속놀이 중 하나이다.특히 팔월 추석날 밤에 대대적으로 마을 부녀자들이 노래, 춤과 함께 원형을 이뤄 뛰며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단체놀이이다.국가유산청 국립무형유산원과 한국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개최되는 이번 공개행사는 강강술래 보유자를 비롯한 보존회원들이 매년 1회 강강술래 공연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해 오고 있다. 이번 공연은 희미해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우리 고유의 민속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개최하고, 행사 당일에는 보존회원들의 강강술래 시연에 이어 관람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어울마당을 펼친다.진도군 관계자는 "이번 공연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마련했다"며 "진도를 찾은 많은 관광객이 강강술래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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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특집] "아이들을 내놓을리 없습니다…그들에게는 돈이니까요"편집자 주= 이번 특집 기사는 5월5일 어린이날을 맞아 그동안 진행했던 아동 관련 인터뷰 내용만을 묶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 보니 보육시설에 와 있었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해외로 입양됐으며, 성장한 뒤에 한국에 있는 친부모를 찾으려 했더니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아이들의 일부는 성장 과정에서 폭행과 폭언을 당하고, 성 학대 피해를 보고, 정신 질환자로 취급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 아이들을 걸어 다니는 돈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지른다. 그러니 아이들에 대한 학대는 없었는지, 입양 등의 과정에서 부정한 돈이 오간 것은 아닌지, 시설 대표의 횡령이나 인사 부정은 없는지 등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다음은 연합뉴스가 2022년 9월부터 진행한 [삶] 인터뷰 가운데 아동 관련한 내용만 묶은 것이다. ◇ 서기원 실종아동찾기 협회 대표 서기원(61) 대표에게 올해는 딸이 실종된 지 30년이 되는 해다. 그는 여전히 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4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동안 매년 힘들었지만, 올해는 더욱 힘들다"면서 "정신적으로 힘들고, 몸도 아프다"고 했다. 서 대표는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세월만 흐르고 있어 화가 나고 안타깝다"면서 "실종 아이의 부모들은 수사권이 없기에 경찰만 바라보고 있는데, 경찰이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장기 실종 아동 수사는 경찰의 광역수사대 미제사건팀에서 최근에 형사기동대로 옮겨졌지만 전담 수사를 하지 않는 한 해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했다. 서 대표는 더 이상 아이들이 실종되지 않도록 부모들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들이할 때는 사전에 지문 등을 경찰에 등록해 놓는 게 좋다"면서 "목이나 손목에 연락처 등을 걸어놓는 방식은 상황에 따라서는 유괴범의 협박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연합뉴스가 작년 5월12일 송고한 [삶] 실종 자식 찾으려 광주리 장사하면서 집집 방문하는 어머니, 5월17일 내보낸 [삶] "해외 입양은 인신매매였다…국가가 범죄에 가담"에 들어 있는 서기원 대표의 답변이다. -- 외동딸 희영의 실종사건 내용은. ▲ 초등학교 4학년, 만 10세였던 희영이가 실종된 것은 1994년 4월 27일이었다. 그날 오후 3시께 학원에서 외갓집으로 왔다가 놀이터로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희영이 외갓집은 우리 집 근처에 있었다. 나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관들은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더니 다음 날 오후 늦게서야 현장에 나왔다. 그 이후로 3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이를 찾지 못하고 있다. -- 실종아동 가족들의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 ▲ 대부분의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다닌다. 재래식 화장실, 맨홀 안을 뒤지기도 하고, 광주리장사를 가장해 집집이 방문해 혹시 자기 자식이 있는지 살피기도 한다. 상당수 가정의 가계는 파탄 나고, 80% 정도는 이혼한다. 실종된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에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겨울에 난방도 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만, 실종 아이 부모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삶을 견뎌야 한다. -- 본인은 딸을 찾기 위해 어떤 곳을 방문했나. ▲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윤락가도 뒤졌다. 보육시설, 장애인시설 등 각종 시설 3천 곳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없다는 답장은 2∼3곳에서만 왔다. 거의 모든 시설이 답장조차 안 한다. -- 보육시설은 협조를 잘 안 해주나. ▲ 보육시설에 직접 방문해서 입소자 파일을 보자고 하면 안 보여준다. 그래도 다시 한번 요청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 없다고 하면 없는 줄 알면 되지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이러느냐"고 화를 냈다. 파일을 열람해 봐도 아이 사진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부 보육원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우리를 데려가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교에 간 아이, 학원에 간 아이, 밖에서 노는 아이 등이 많다 보니 그렇게 아이들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보육시설에 가서 아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보육시설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나. ▲ 아이들이 생계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육원 아이 한 명에 많게는 연간 1억원 정도의 정부 예산이 들어간다. 실종자 부모가 보육원에서 아이를 찾아내면 보육원 입장에서는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를 내줄리 없다. -- 실종 아이들은 주로 어떻게 되나. ▲ 범죄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면 보호시설, 보육시설, 장애인시설 등 시설을 거쳐 국내외로 입양되거나 국내 보호 시설에서 성장한다. -- 해외 입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는 것은 범죄와 다름없다. 입양을 원하는 외국 가정이 아이의 특정 유형을 제시하면 입양기관이 보육시설을 돌아다니면서 적합한 아이를 찾는다. 이 과정에서 수천만 원의 뒷돈이 오간다. 한국의 아이를 입양하는 외국의 가정은 자기 나라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다. -- 정부는 해외 입양과정에서 뒷돈이 오가는 것을 모르나. ▲ 정부는 알고 있다. 과거에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가 금품 제공 실태를 조사하려다 그만둔 일이 있다. ◇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조윤환(45) 대표와 그의 누나는 각각 6살과 7살 때 어머니에 의해 버려졌다. 조 대표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누나는 서울역에 유기돼 각각 부여와 목포의 보육원에서 자랐다. 조 대표의 누나는 보육원에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서울 용산구의 지역과 다니던 교회의 이름까지 정확히 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보육원에게 고아들은 모두 돈이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30여년만인 2018년에 부모를 찾았다. 경찰은 수사에 들어간 지 불과 몇개월 만에 부모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확인했다. 이는 경찰이 고아들의 부모를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 조 대표는 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현재 전국의 보육원에는 2만5천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다"면서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부모의 이혼 등에 의해 들어온 아이들이고, 나머지는 부모에 의해 유기된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 보육원 아이들은 철저히 통제된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방치되는 경우가 있다"면서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고 보육원 내에서 게임을 하고 있어도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조 대표는 "아이들이 뭔가를 요구하고 귀찮게 굴면 보육원은 정신과 약을 먹이는 사례도 꽤 있다"고 했다. 그는 "어린이날에 보육원 아이들은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서 가족 중심의 명절인 설날이나 추석보다는 덜 외롭다"면서 "행사의 주최 측 목적에 맞게 끌려다니기보다는 자신의 꿈과 소망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날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21일 송고된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는 기사에 담긴 조윤환 대표의 답변이다. --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려졌을 당시를 기억하나. ▲ 6살 때였다. 엄마와 함께 천안 외할머니댁에 며칠 머무른 뒤 서울 집에 가기 위해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엄마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를 모셔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엄마가 나의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벌을 주는 줄 알았다.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할 테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엄마 동전에도 손을 안 대고, 엄마가 주는 옷을 그대로 입고, 편식하지 않겠으니 한 번만 엄마를 보내달라고 빌었다. 울고 또 울었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밤이 돼서 경찰이 나를 데려갔다. -- 찾아온 경찰관한테 뭐라고 했나. ▲ 울면서 엄마를 찾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경찰은 나의 손을 잡고 터미널을 한 바퀴 돌고는 엄마가 없으니 이제는 가자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터미널 내 한구석에 숨어서 나를 계속 지켜봤다고 한다. 어머니는 경찰관이 나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터미널을 떠났다고 한다. -- 경찰서와 대방동 보호소, 보육원은 부모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았나. ▲ 나는 경찰에 나의 이름과 누나의 이름 정도는 정확히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서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방동 보호소에서도 나는 누나 이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으나 성장한 뒤 확인해봤더니 기록돼 있지 않았다. -- 누나도 부모를 찾아달라고 보육원에 부탁했을 텐데. ▲ 누나는 한국 나이로 8살이었으니 본인과 동생, 어머니의 이름을 또박또박 댈 수 있었다. 누나는 부모를 찾아달라고 보육원에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도 무시당했다고 했다. 당시에 누나는 다니던 용산구 평강교회도 기억하고 있었다. -- 보육원은 왜 누나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나. ▲ 고아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고아 한명을 데리고 있으면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온다. 누나가 보육원에서 나가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든다. 이런 것이 인신매매다. ◇ 이경림 세움 대표 이경림(59)은 교도소 수용자 자녀들을 지원하는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의 대표다. 수용자 자녀는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데도 사회적 형벌을 받는다. 생계가 어려워지고, 소년·소녀 가장이 돼서 홀로 살기도 한다. 이 대표는 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부모 중 1명 또는 양부모가 교도소에 있는 18세 미만의 아이는 전국에서 1만여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는 "어린이날을 맞아, 세움이 지원하는 미취학 아동과 초등학생에게는 과자 선물 세트를 보냈고, 중고생에게는 친구들과 즐길 수 있도록 영화와 팝콘의 티켓을 보내줬다"고 했다. 이 대표는 "세움은 이번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면서 "정부도 수용자 자녀의 소중함을 인정한 것이니 수용자 자녀들은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2023년 10월27일 송고한 [삶] "엄마, 나 살고 싶어요…우리 이렇게 죽지 말아요"라는 제목의 기사에 담긴 이경림 대표의 답변이다. -- '세움'은 어떻게 시작됐나. ▲ 초등학교 5학년생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으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트럭에 채소를 싣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무면허 사고로 수감됐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부인과 이혼한 상태였기에 딸을 동네의 지인한테 맡겼다. 얼마 후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이 사람이 아이를 성적으로 학대한 것이다. 이 아이가 로뎀나무 집에 오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 나는 수용자 자녀에 대한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 세움은 주로 어떤 일을 하나. ▲ 부모 중 한명 또는 부모 모두가 수감되면 그 자녀들은 위기에 빠진다.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고, 정서적으로 흔들린다. 돈이 없어서 면회도 가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한다. -- 부모가 범죄를 저지르면 자식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 양가(兩價)감정이 있다. 내가 왜 저런 부모한테 태어났는가 하는 원망이 있을 수 있다. 동시에 사람들이 범죄자라고 비난하지만 나한테는 하나뿐인 엄마이고 아빠인데,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 수용자 가족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는 일도 있을 듯한데. ▲ 한 엄마는 평범한 주부였다. 어느 날 남편은 사업 실패로 경제사범이 돼서 수감됐다. 알고 보니 남편은 바람까지 피웠다. 이혼한 엄마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지방에 내려갔다. 공장에 취업했지만, 생활이 쉽지 않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왔다. 이 엄마는 죽고자 했고, 아이들까지 하늘나라로 데려가려 했다. 이때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초등학생 아이들 3명은 "엄마, 나 죽기 싫어. 나 살고 싶어. 우리 죽이지 말고 같이 살아요"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세 아이를 껴안고 목 놓아 울었다. 엄마는 아이들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면서 후회했다. ◇ 김성은 갈렙 선교회 목사 김성은(59) 목사는 탈북민을 한국에 데려오는 일을 많이 했던 사람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한국으로 인도한 탈북민이 1천여명에 이른다, 그가 직접 밀림을 헤쳐가면서 탈북민을 구출하는 모습은 다큐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에 담겨 있다. 그의 부인 박에스더 목사도 북한군 중대장 출신의 탈북민이다. 뇌 병변 장애를 갖고 있었던 아들은 부부가 탈북민 지원 자금을 얻기 위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7살의 어린 나이로 숨졌다. 김 목사는 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북한의 어린이들은 자기 행복보다는 가족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힘겹게 일을 하거나 구걸을 하고, 심지어 도둑이 되기도 한다"면서 "북한의 어린이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2013년에 남한으로 구출한 탈북 고아 신혁이는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구걸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면서 "신혁이는 갈렙 선교회의 도움으로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남북한 어린이 모두가 손잡고 행복한 통일 한국을 만들어갈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올해 3월29일 송고한 [삶] "난 좀 전에 먹었으니 이건 아들 먹어"…결국 굶어 죽은 엄마에 들어있는 김성은 목사의 답변이다. -- 꽃제비의 어원은. ▲ 북한과 중국 접경지역에서 여기저기 떠돌며 구걸하는 북한 아이들을 꽃제비라고 부른다. 러시아어로 '꼬체비예'는 유랑인, 떠돌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꽃제비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 어떤 아이들이 꽃제비가 되나, ▲ 부모 모두가 죽거나, 아버지나 어머니 한 분이 사망해서 꽃제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양친이 모두 살아 있는 꽃제비도 있다. 아버지, 어머니라고 해서 더 이상 아이를 먹여 살릴 능력이 안 되니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만나겠지'라는 생각으로 흩어져 각자 자기 입은 자기가 건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먹을 것이 생기면 "나는 먹었어. 너 먹어"라고 하면서 자꾸 자식에게 건네고는 굶어 죽는 경우다. -- 꽃제비들은 두만강을 건너오기도 한다는데, 위험하지 않나. ▲ 자동차 타이어 튜브를 타고 강을 건너기도 한다. 북한군 경비병은 아이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알고도 봐주는 경우가 많다. 어린아이들은 중국에서 잡혀 북한으로 끌려와도 대체로 처벌받지 않는다. 꿀밤을 맞는 정도다. 북한군 경비병은 강을 건너는 아이들에게 '경제과제'를 주기도 한다. 구걸해서 얻은 돈으로 담배나 신발 등을 사오도록 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코로나 사태 이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꽃제비들이 국경선을 넘을 수 없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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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아미, 퓨전국악 디지털 싱글 ‘강강술래’ 발표판소리 소리꾼 ‘아미(AMI)’(소속사 스튜디오 아라리오)가 디지털 싱글 ‘강강술래’를 발표하고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잇는 퓨전국악 열풍 재현에 나선다. 지난 2020년 발표된 ‘범 내려온다’는 밴드음악과 국악을 접목시킨 신박한 곡에 현대무용팀의 안무 등이 더해지며 국민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각종 방송과 광고, 커버, 패러디까지 다양한 콘텐츠와 밈이 양산됐고 한동안 이날치의 인기는 이어졌다.‘아미’의 이번 디지털 싱글 ‘강강술래’는 EDM 장르로, ‘범 내려온다’보다 한발 더 앞선 트랜디한 감성을 담았다. 기존의 퓨전국악 곡들이 대부분 밴드 구성인데 반해 ‘강강술래’는 솔로곡인 점이 특징이다.원래 강강술래는 중요 무형문화제 8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추석날 보름달 아래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원을 그리면서 손을 잡고 돌며 노래하는 전통놀이다.소리꾼 ‘아미’의 신곡 ‘강강술래’는 이러한 전통 강강술래 노래를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켰다. ‘아미’ 특유의 전통 판소리 창법과 유니크한 보컬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장르를 넘나드는 신선함을 선사한다. 특히 반복적인 EDM 멜로디가 중독적인 곡이다.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OST, CF ‘LG grem’ CM송 등의 프로듀서인 Ra.L(라엘)이 작사, 작곡, 디렉팅을 맡았다.‘아미’의 신곡 ‘강강술래’의 국내 음원은 3월 18일, 해외 음원은 3월 20일 공개됐으며 현재 네이버뮤직, 멜론, 지니뮤직, 벅스, 유튜브뮤직 등에서 들을 수 있다.한편 ‘아미’는 본명이 왕해경으로, 인간문화재인 아버지(왕기창)와 삼촌(왕기철, 왕기석)을 배출한 판소리 명문가 출신의 퓨전국악 싱어송라이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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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설에 세배·떡국…'우리식' 강조하며 김일성 동상에 헌화북한도 민족 대명절인 설에는 세배를 하고 가족과 함께 떡국을 먹으며 남한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내지만 '우리식 명절'을 내세우며 사회주의식으로 명절 풍습을 계승·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0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설 명절은 우리 인민이 가장 즐겨맞는 명절 중 하나"라며 설을 준비하는 북한의 모습을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설이 다가오면 집집이 안팎을 깨끗이 정리하고 설 음식도 마련한다. 설 당일에는 일찍 일어나 미리 준비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떡국을 올리는 '떡국 차례'를 지내며 집안과 마을 어른들에게 세배도 한다. 윷놀이, 널뛰기, 연띄우기, 설매타기 등과 같은 명절 분위기를 돋우는 민속놀이도 즐긴다. 조선중앙방송도 이날 명절 준비로 분주한 미래과학자거리 선경식당의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중앙방송은 선경식당 주방장 인터뷰를 통해 식당에서 설 명절을 맞아 불고기, 냉면, 막걸리, 녹두지짐을 비롯한 각종 민족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북한은 설·추석보다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과 김정일 생일 '광명성절'(2월 16일) 등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기념한다. 한때 봉건 잔재로 간주해 설을 명절로 지내지 않다가 1989년 김정일 지시로 다시 쇠기 시작해 2003년 공식 휴일로 지정했다. 명절이긴 하지만 북한은 남한과 달리 설 당일부터 쉬고 이동의 자유가 제한돼 있어 귀성·귀경길 전쟁은 없다. 사회주의식 명절을 지내야한다며 설 즈음 조상의 묘가 아닌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있는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이나 각지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찾아 헌화하는 게 관례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우리 인민 모두가 기쁨과 즐거움 속에 맞고 보내는 설명절에는 언제나 우리의 것을 제일로 여기고 내세우시려 마음써오신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크나큰 심혈과 로고가 뜨겁게 깃들어있다"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여러 계기에 설 명절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대로 쇠도록 할데 대해 교시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설 명절을 계기로 수도와 지방의 곳곳에서 예술 단체들이 공연을 펼쳤다며 "내 나라, 내 조국의 위대한 력사를 끝없이 빛내여가려는 인민의 철석의 의지를 잘 보여줬다"고 소개했다. 조선중앙TV는 "설 명절의 이 아침 온 나라 전체 인민은 당 중앙의 영도따라 애국으로 단결해 웅대한 투쟁 목표들을 기어이 완수할 드높은 결의를 다지며 우리 국가와 인민의 위대한 존엄이시고 상징이시며 대표자이신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부디 안녕하시기를 삼가 축원한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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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8)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해마다 명절이 되면 어머니는 '밀백기'를 만드셨다. 추석과 설은 물론 유두 백중에도 빠짐없이 준비하셨다. 설날 필수적으로 장만하는 것이 조청(엿)이고 추석날 필수로 준비하는 것이 송편이라면 모든 명절을 통틀어 준비하는 음식이 '밀백기'다. 송편도 각각의 명절마다 준비하던 것이었지만 어느 시기부턴가 추석 음식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몇 차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설날 가래떡을 찍어 먹기 위해 조청을 준비한다는 점도 지난 칼럼에서 소개해두었다. 그렇다면 왜 명절에 밀백기를 해야만 했을까? '밀+백기'에서 '밀'은 명절을, '백기'는 두부조림 혹은 두부탕을 말한다. 진도, 해남 등 남도 일부 지역에서 명절을 '밀'이라 한다. '밀'이란 명칭의 분포권은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잔존지역보다 훨씬 넓었을 것이다. <전남방언사전>을 쓴 이기갑은 '밀'이 '명일'에서 온 말일 수 있다 한다. '명일(名日)'은 '명절'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경일'의 총칭이다. '일'이 탈락하면서 '명'이 '밀'로 변화되었다. 백기라 호명하는 두부조림은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치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넣기는 하지만 두부볶음 혹은 두부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뚜부백기'라고도 한다. '백기'는 어디서 온 말일까? 감옥 출소 후 먹는 두부의 출처 콩밥 먹는다는 말이 있다. 징역살이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에는 전쟁물자 동원을 위한 공출제도 등으로 인해 농촌생활이 극도로 궁핍했다. 보리밥은커녕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 만주지방에서 생산되던 값싼 콩을 대량으로 들여와 콩밥을 해먹인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가?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나 2% 부족해 보인다. 주목할 것은 감옥을 출소할 때 너나없이 흰두부를 입에 가득 넣어 먹인다는 점이다. 오래된 전통일까? 근대에 생긴 풍속일까? 출소자에게 두부를 먹이는 것은 흰색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의미, 정화, 씻김 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흰두부처럼 정화하고 새사람이 되라는 의미로도 풀이한다. 또 이런 해석도 있다. 교도소에서 콩밥을 많이 먹었으니 다시는 감옥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먹인다는 것이다. 두부가 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치라나. 감옥에서 영양공급이 불충분했을 것이므로 영양소 많은 두부를 먹인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 설은 콩밥이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는 설에 배치된다. 두부에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필수 아미노산, 뇌세포의 대사 기능 촉진, 불안감을 해소하는 가바(Gaba) 등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영양식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라는 뜻으로 들린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츠바이치((吃白起·흘백기) 전통 명절에 밀백기를 만드는 곳을 추적하였더니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의 한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산시성에 현존하는 백기육(白起肉)이란 흰두부 요리다. 고기 육(肉)자가 들어가 있으니 고기요리일까? 아니다. 순두부탕이라고 할만한 구성이다. 진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지금도 명절마다 만들어서 먹는 밀백기와 많이 닮았다. 고기도 넣지 않고 갖은양념도 넣지 않고 그저 흰두부 중심으로 끓인 음식이다. 아니, 무엇보다 백기라는 이름이 같다. 산시성에서는 이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츠바이치(吃白起·흘백기)'라 한다. '백기를 삶아 먹는다'는 뜻이다. '백기'는 사람 이름이다. 전국시대 때 얘기다. 진(秦)나라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백기(白起)가 지금의 산시성 가오핑(高平)시에서 조(趙)나라를 대적한다. 마침내 조나라 군사가 투항했는데 '반란이 우려된다'며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속에 군사들을 참살했다. 한반도 현대사에 산견되는 제주 4.3이며 여순이며 민족동란에 이르는 처형의 모습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조나라로 돌려 보낸 어린이 240명 외 45만 명을 이같은 방식으로 갱살(坑殺,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음)했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사기 열전에는 이를 '조나라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趙人大震)'고 보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백기는 중국 역사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잔혹한 처형 혹은 살인자로 낙인찍혀 있다. 산시성 사람들이 백기육 즉 두부탕을 먹는 것은 원수의 뇌를 씹어먹듯 조상의 한을 되갚는다는 의미라 한다. 물론 조나라의 패배는 효성왕 조단(趙丹, 기원전 265~245)이 노장 염파를 전쟁에 쓰지 않고 돈을 써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방식으로 애송이 조괄(趙括)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한다. 옹졸한 제왕이 무능한 장수를 등용했기에 40만 대군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다. 어머니가 명절마다 만드시던 '밀백기'를 상고한다. 진도와 남도지역에 잔존하는 밀백기의 전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남도지역과 지금의 산시성 곧 기원전 조나라와 어떤 특별한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대(對)중국 문화교류의 풍속이 진도를 중심으로 한 남도지역에 잔존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또한 어떤 원수의 뇌를 씹어먹듯 밀백기를 명절마다 만들어 먹었으며 이 행위를 통해 조상의 한을 되갚고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원수는 누구이며 우리의 조상은 어떤 패전 혹은 어떤 억압의 시대를 감내해왔단 말인가. 어쩌면 출소하면서 흰두부를 먹는 전통도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전통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통틀어 유사한 전통과 풍속도 있다. 중국 산시성의 흘백기와 진도 등 남도 해안의 밀백기 풍속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생각해보는 추석이다. 두부의 역사 지역에 따라 더부, 둠비, 두위, 뒤비, 드비, 디비, 조패, 조푸, 조피, 조프 등으로 부른다. 언제부터 두부를 만들어 먹었을까? 심승구의 논문 '조선시대 조포사와 진관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두부가 전래 된 시기는 고려말이다. 이색의 <목은집>에, 과거를 치른 뒤 두부를 먹었다(1365년)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최덕경의 '대두의 기원과 장(醬, 젓갈, 간장, 된장)·시(豉, 메주) 및 두부(豆腐)의 보급에 대한 재검토'에 의하면 두부가 문헌 속에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오대(五代, 당과 송의 중간시대)다. 조포사(造泡寺)와의 연관은 두부를 '두포(豆泡)' 혹은 '포(泡)'라고 불렀다는 데서 찾는다. 이 사찰에서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들었다. 능(陵, 임금의 무덤)이나 원소(園所, 왕세자의 무덤)에 속한 국가기관의 하나, '능침사' 또는 '능침조포사' 등으로 불렀다. 이외 관가에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던 곳을 조포소라고 했다. 이들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이전 두부는 오늘날의 형태라기보다는 거의 순두부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의 제사용 두부와 그 의미들을 상상해볼 수 있는 정보들이다. 이것으로 백기(白起)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원전까지 두부가 소급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아마 두부가 만들어진 이후 각색되거나 재구성된 신화 아닐까 싶다. 우리 어머니들이 명절마다 두부를 만드시던 까닭 또한 명절이 절기 제사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기원에 관한 소급의 가부를 떠나 '밀백기' 혹은 '두부백기'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한중간의 문화 유사성이다. 또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 출소자들에게 먹이는 흰두부는 죄의 씻음이나 정화, 나아가 거듭남의 의미(과거를 보고 나서 먹는 두부)가 담긴 풍속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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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2편)가라후토에 맺은 의형제 박득수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화태에 들어가셔서 산중에 사는 누나 집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심한다. 누님이 그저 밥은 먹여 주지만 옷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고 하니까 더욱 눌러 앉을 수가 없게 된다. 박득수는 누님 집에서 3년 있다가 돌린스크 시내로 내려 왔다. 일본사람의 꼬임에 모집으로 들어온 조선사람들을 만나 같이 잡일을 하게 된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숙소도 함께 하면서, 모두 정이 들어서 형님 아우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내게 되는데 박득수는 가장 막내였다. 5년후 가장 나이 어린 박득수는 글도 아는 정직한 청년이어서 형님들에게 많은 사랑과 희망을 받게 된다. 장가를 갈 나이가 들자 가장 맏형 고 오지상이 당장 장가를 가야한다고 한다. ”수!, 너 여기 있지 말고 한국에 나가 가주고 장개 들라. 여기서는 여자들이 없다 보니께 일본 여자한테 장개 가지 말고 한국 가서 장개 들어 가지고 오라! 우리는 조선에 처도 있고 자슥도 두고 와서 이렇지만은, 너, 다까하라, 너는 이렇게 해서 나이 어린게 안된다. 고향에 가서 장가를 들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어라" 그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사람들과 누이 내외가 조선행 배삯을 거둬주어서 박근수는 24살에 고향에 나가게 됐다. 8년 만에 나간 조선에서 집안 어른 중신으로 아내(강순예)와 결혼하게 됐다. 가라후토 강제모집과 이산 박득수는 결혼 후 조선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박한 희망은 허사가 되어 버렸다. 안성면 사무소에서 모집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6년, 1937년에 흉년이 들었지. 2년 동안에 흉년이 들어서 농민들은 먹고 살기가 매우 바빴어. 마침 그럴 때 일본이 지나사변으로 중국과 싸우다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돼 노무자가 부족했어. 흉년이 든 상황에서 일본은 모집을 시작했단다. 어느 탄산이 모집한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었었지.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생활이 바쁘고 먹고 살기가 바쁜데 모집을 한다니께, "아! 일할 데 있으면 어디든지 가야지!” 라고 하니 일본 놈들이 그저 막 강제오 데려 간거야. 1938년에 네 둘째 박기남 삼춘이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모집가서 탄산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귀가 됐어." 아버지가 나에게 그 당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처음에는 모집 광고로 해서 많은 조선인들을 데려갔는데 점점 모집을 광고 없이 하고 다음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강제연행으로 바꿨다. 일본회사가 모집을 하면 조선총독부를 통했는데, 총독부에서 어느 면에서 몇 명을 보내야 한다면 조선 앞잡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영장을 전달했다. 박득수는 이미 가라후토에서 살다 왔으니까 모집영장이 잘못 나왔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토리우치보(헌팅캡)를 쓰고 당꼬바지를 착용한 형사가 새살림을 시작한 신접 살림집으로 들이닥쳤다. ”너, 다까하라, 이리 오라! 너 영장 받았니? 왜 면사무소에 안 왔니?" "나는 벌써 화태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영장을 내게 잘못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빠가야로! 너는 무조건 가야해! 빨리 준비해서 나와" 이렇게 새신랑 박득수는 강제모집으로 결혼 일년반 만에 가라후토로 끌려가게 됐다. 면사무소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백 여명의 모집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 니무라와 마쪼까 두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동네 경찰서에서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 앞잡이들이 와서 "우리는 내선일체다 천황의 명령이다”라고 하면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지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았다. 이제 결승전이다 보니까 1년간 가라후토로 가서 일해라”고 윽박지르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노예 취급을 했다. 25살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운명과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가 나가면 집에 일할 사람이 없고 어머니는 굶어 죽는다”고 애원을 하니까 앞잡이들은 ”집에 여자들이 있으니 1년간 살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고 달랬다가 발로 차고 때렸다. 앞잡이는 총독부 명령에 따라서 국민들은 꼭 가야만 한다고 했다. 아니면 니네 가족은 배급을 못 탄다. 아니면 아직 어린 여동생이나 딸을 위안부(정신대)로 내놓으라고 칼을 휘두르며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무주군 안성면에서는 가라후토에서 온 일본인 사무소장과 김수문이라는 함바(飯場, 현장 근처 노동자 숙박소)사장을 맞이했다. 가라후토에 가면 얼마의 돈을 번다든가 어떻게 산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없이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안성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열둘인가? 열넷인가? 그 정도 모였다. 함바 사장인 김수문은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모우러 나가고, 일본인 사무장은 남아서 징용을 가는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기차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일본인들은 그 당시 공습 때문에 무서우니 밤에 다녔다. 부산에 도착하니까 소독소로 보내서 모든 일행을 소독하고 목욕도 시켰다. 밤 아홉시 쯤 되어서 부두에서 연락선 공고마루에 승선했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서 출발하여 일본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으로 갔다. 아침 해 뜰 무렵에 도착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합쳐져서 열여섯 명이 한 그룹이 되어 함께 다다미(たたみ,타타미)를 배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하등실 공간에서 모두 다 잠을 잤다. 그 때가 6월, 여름이니까 춥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하관에서 동경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동경에서 또 하루 자고 기차를 갈아타고 아오모리까지 가서 다시 하루 자고 거기서 북해도 하코다테까지 배로 갔다. 북해도 북부에 위치한 와카나이에 가서 사할린 섬 오도마리항까지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득이한 여행은 8일 이상 걸렸다. 박득수는 가라후토에서 오치아이(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다. 깊은 산 골짜기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만했다. 6개월 후 조선에서 아내 강순예가 화태로 왔다. 박득수가 배치된 산판은 오치아이에서 한 630리가 되는데 이미 30명의 모집으로 온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새집도 얻어 주고 살림살이도 장만해 주었다. 가족들도 한 여섯, 일곱집이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큰 고생은 안했다. "개인집에서 그 때는 한달에 2원씩 집세 받고 세 놓고 그랬어요. 방 두 칸짜리 이런데서. 그때는 주로 화롯불, 난롯불 놓고 거기서 밥 해 먹고 그렇게 살고 했어요.” 산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한 분들이어서 강순예가 편지나 문서를 작성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한테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편 박득수도 지식인으로서 브리가지르(бригадир,조장, 팀장)로 일했다. 벌목공들은 2년 동안의 계약을 맺고 왔는데. 기한이 지나도 일본 당국은 조국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월급은 다 주지 않고 조금씩 내주었다. 나머지는 조선에 갈 때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끝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판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박득수도 역시 시리도리(현 마카로프) 제지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거기에서 일년 동안 일하고 조선사람들 한 30명을 모아서 니또이 산판에 가서 벌목일을 시작했다. 3년 후 1942년 조선에 살고 있는 친척들한테서 편지가 왔다. 조국에서는 너무나 살기 어려우니까 가라후토로 불러 달라고. 그래서 증명서를 보내 홀로 계신 어머니와 큰 형 식구 5명이 니또이 촌으로 오게 했다. 몇년 후 고모 가족도 우리가 사는 니또이에 이주하여 가까운 곳에서 함께 등 부비고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사람들은 기르던 앵무새와 개까지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조선인들은 영영 귀환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동원 되어 잠시 있다가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4만3천 여명의 이산가족이 해방된 사할린에 나타난 것이다. 언제가 조국과의 상봉을 꿈꾸며 이국 만리에서 낯선 민족들과 뒤섞여 살아야만 했다. 러시아 180여개 민족 중 식민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힌채.......소련은 일본이 버리고 간 탄광과 산판. 펄프공장에 투입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불안정한 조국은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남화태에 남겨진 30여 지역 탄광에서 돌아가는 기계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이 작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인의 몸 사이즈에 맞춘 탄광 지하 갱도는 서양인의 체구에 전혀 맞지 않았다. 남겨진 조선인을 관리하기 위해서 소련 정부는 큰땅(대륙)에 사는 고려인 지식인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완장을 채우고 우리를 감시하고 체계적 시스템을 조직하여 노동력을 착취해 나갔다. 배급을 받아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져 가고 일본말과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소련 정부에 적응하는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조선말과 조선 이름 대신 러시아 이름으로 바꾸어야 불이익을 안 받게 된다. 사할린 한인 국적도 조선, 일본, 소련, 북한, 러시아 등으로 5번 변경되면서 국적에 따라서 이름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2세부터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젖줄같은 고향땅 논밭전지와 집문서를 맡겨놓고 온 사람,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를 친척집에 맡겨놓은 사람, 어여쁜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사람 등등 사연도 많고 많다. 조선인들은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미쳐서 죽고 얼어죽어 나갔다. 장가도 못간 청년들은 남편 잃고 여러 명의 아이가 딸린 여자와 살아야 하고, 두고 온 가족을 그리다가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홀아비로 살다간 사람, 산판과 탄부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지병을 얻어 일찍 죽거나 나이를 먹어서 죽은 사람들은 결국 고향으로 못가고 가라후토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특히 정신대로 끌려와서 버려진 어린 여성들을 평생 껴안고 남편으로 아들 딸로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노래 고향을 그리던 박득수는 1977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 공동묘지에 영원히 안치했다. 매년 8월 15일 추석날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묘옆에 묵묵히 서 있다. 3명의 아들과 2명의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그리운 아버지를 소환해 본다. 오늘은 아버지를 위한 시를 준비했다. 세월을 잘못 만나서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살다가신 아버지의 이산과 억류, 미귀환에 대한 아픔을 시로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두 손으로 바쳤다. 나는 천천히 낭송을 해 드렸다. <아버지의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고 추석밤 청명한 보름달 바라보며 철새따라 가고팠던 아버지의 노래! 일제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을 여의고 열여섯 젊은 시절 가장이 되어 일제시대 엄동설한 화태로 들어가서 산판에서 만고풍상 겪으셨고 스물다섯살 고향가서 아내를 얻었지만 꿈같은 신행도 얼마 못가고 강제모집 가라후토로 끌려갔네 산판에서 위험한 벌목장에 목숨을 바치시고 소련시대 위태로운 강에서 유송하시고 토끼같은 사남사녀 팔남매 밝게 키우시고 조선민족 풍습과 예의범절을 가르치시네 육년동안 험한 중풍에 시달리셨으나 자식 앞에서 흉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그리운 고향주소 소리없이 불러보시네 매년 팔월십오일 아버지 묘비명에 서있네 살아생전 아버지의 소원을 못 들어드려서 손자손녀들 사할린에 뿌리를 내리지만 밀양박씨 대대손손 영원하리라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 한 구절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집 주소였던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는 아버지의 노래이고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잊지 않으려고 늘 우리들에게 되새겨 주셨던 것이다. 너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밀양박씨 집안 어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갈 수 있었다. 나는 11년전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았지만 우리 집안을 알던 이웃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빚이 되었는데. 2019년 어느 봄날 다시 무주땅을 찾아가서 안성면 이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이 총 14명이 강제징용으로 차출되었는데, 돌아 온 사람은 단 1명만 부상을 당해서 장애자가 되어 돌아왔는데 후에 그 자식들은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의 이름이 박힌 호적등본 사본을 안성면사무소에서 신청해서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 박득수와 주소가 찍힌 호적등본과 아버지가 살던 집터의 흙을 고이 담아서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를 뵐 낯이 있게 되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2달후 7월이 되어 사할린에 들어갔다. 사할린 땅에 묻히신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의 묘지를 찾았다. 아버지 혼령 앞에 호적등본을 보여 드리고 고향집 주소를 큰소리로 읽어 드렸다. 이어서 고향집 흙을 뿌려 드리면서 술 한잔을 올리자 나는 아버지가 읊으시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아들에게 손자에게 일러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집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 아버지! 이제나마 편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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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자연풍토적 배경과 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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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마두희(馬頭戱)가 뭘까?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안동대 한양명은 '대보름 무렵에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는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라고 정의했다. 2014년 '비교민속학'에 게재한 「울산 마두희의 전승양상과 지역성」에 보다 자세한 내용을 풀어썼다. 『학성지鶴城誌』(1749),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보유(慶尙道補遺)편 속의 『울산부읍지蔚山府邑誌』(1557∼1765),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속의 『울산부읍지』(1832), 『영남읍지嶺南邑誌』 속의 『울산부읍지』(1895), 『학성잡기鶴城雜記』(1902) 등 관련 기록을 이미 소개하고 분석했다. 말과 관련된 민속놀이나 줄다리기에 대한 문헌들이 희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만큼 마두희가 울산지역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풍속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말(馬)과 관련되었을 가능성 추적, 어떤 특징을 가진 줄다리기인가를 헤아려보는 일, 울산 동대산의 형국이 말머리인데서 비롯되었다 하니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일 등이었다. 남도지역에서도 고을마다 마을마다 행하던 줄다리기가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이 연행의 중심이긴 하지만 2월 1일 '하릿날'에서 추석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여기서 마두희의 맥락을 상고해보는 것은 남도지역을 포함한 우리나라 줄다리기의 종다양성을 포착해보자는 취지이기도 하다. 제주도 약마희(躍馬戱)와 신안 도초도 죽마제(竹馬祭) 다시 읽기 대부분의 줄다리기를 벼농사권의 민속놀이로 해석하는 이유는 줄의 재료 중 볏짚이 가장 많이 활용되고 칡, 억새, 죽피 등이 보조재로로 사용된다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줄다리기는 아니지만 제주도 영등굿에 남아있는 약마희(躍馬戱, 영등신을 치송할 때 행했던 민속놀이)의 사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말(馬)을 이름으로 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2월 초하루 귀덕, 김녕 등지에서는 장대 12개를 세우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애월에 사는 사람들은 말머리 모양의 떼배를 만들어 채색 비단으로 꾸미고 약마희를 해서 신을 즐겁게 한다. 보름이 되어 끝내니 이를 연등이라 한다. 이 달에는 승선을 금한다." 장대는 목간(木竿)이다. 떼(槎) 모양의 말머리(馬頭)처럼 만들어진 떼배다. 왜 이런 배를 만들어서 비단으로 곱게 꾸몄던 것일까? 지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지역 축제에서 매우 화려하게 배를 장식하는 사례를 견주어볼 필요가 있다. 한편 신안군 도초면 고란리에는 당제(堂祭) 말미에 연희하는 죽마놀이가 있었다. 죽마제(竹馬祭)라고 한다. 지금은 간척되어 내안이 농토가 되었지만 본래 해안 마을이다. 제주도의 약마희가 연희되었던 공간과 유사한 배경이라고나 할까. 당산의 신격이 마신(馬神)이다. 대나무로 말의 골격을 만들고 머리는 짚으로 엮어 단단하게 뭉쳐서 한지로 씌우고 먹으로 눈과 코를 그린다. 귀도 대나무로 만들고 목에서부터 큰 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꼬리 부분에 붙인다. 그 위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한다. 양쪽 두 갈래의 대기둥 안에 발을 넣게 한다. 꼬리는 댓잎으로 만든다. 마부가 끌 수 있도록 목에 줄을 걸고 양쪽에 매어둔다. 마을당제의 말미에 이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연희하는 일종의 마을극이다. 물론 농경에 기대어 이 놀이를 해석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지문(地文)에서 해문(海文)으로, 울산 마두희에 길을 물어 울산의 마두희는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을까? 중국의 경우, 마두(馬頭), 즉 말머리는 실제 말(馬)의 머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대개 선착장 즉 포구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우리도 전국에 관련 용례들이 남아 있다. 당(堂)머리(堂頭), 닭머리(鷄頭), 용머리(龍頭), 개(바다)머리, 칡(작은 고개)머리 등은 바닷가로 툭 튀어나온 곳 즉 곶의 다른 말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곶은 주로 ~고지, ~구지, ~몰, ~말, 심지어 ~미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국에 분포한 말머리의 용례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현용준이 제주도의 조리지희(照里之戱, 줄다리기)를 이두식 표현으로 해석하여 '조리'를 '줄'로 읽어낸 바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결론만 말한다면 울산의 마두희는 해양문화적 맥락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대개 용(龍)으로 관념되는 울산 내안(內岸)의 어떤 정기를 동해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막는, 아니면 동해의 어떤 기운들을 서쪽편으로 끌어올려 울산부의 기운을 보강한다는 의미들이 들어있다. 풀어 말하면 '동대산 말머리 돌리기 의례'라고나 할까. 동대산에 새겨진 삶의 기록들, 울산에 새겨진 아마도 반구대 암각화까지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의 기억들을 소환하고 거기에 질적인 가치를 담아내는 인문학적 방식이었을 것이다. 대보름이나 추석이 아닌 단오의 행사였다는 점이 그렇고, 비녀목이 아니라 '곳나무(배에서 쓰는 나무)'를 쓰는 것이 그러하며 짚줄이 아니라 칡줄을 사용했던 것이 그렇다. 무엇보다 '말머리(馬頭)'가 마을의 중앙이 아니라 선착장 혹은 '곶'을 함의하는 포구라는 점이 그렇다. 더구나 줄다리기와 씨름을 끝내고 당산목에 감거나 풍요다산을 위해 나누는 것이 아니라 태화강 태화나루에 줄을 내려 배와 관련된 수요를 충족했다는 것 아닌가. 따라서 기왕의 줄다리기들이 땅 특히 벼농사와 관련된 논에 새겨진 삶의 기록들을 소환하는 기억의 장치라면 울산의 마두희는 동해로 횡단하는 물길과 반구대, 장생포, 개운포 등 해양문화적 함의를 포괄하는 줄다리기라고 어찌 아니할 수 있겠는가. 벼농사를 중심 삼는 지문(地文)이 아닌 해문(海文)으로서의 정체를 소환하고 동해의 의미들을 이끌어내는 기제로 울산 마두희의 질적 가치를 다듬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줄다리기 놀이의 근원과 심연 문헌에 나오는 줄다리기 관련 이름들은 발하(拔河), 삭전(索戰), 조리지희(照里之戱), 갈전(葛戰) 등이다. 삭전은 줄(索)을 당기는 놀이라는 뜻이고 갈전은 칡(葛)줄을 당기는 놀이라는 뜻이다. 발하희(拔河戱)로 기록된 것은 이 놀이가 중국의 발하(拔河)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줄을 당기던 놀이였기 때문이다. <한국필리핀축제문화교류협회> 김정환 이사장에 의하면, 필리핀에서도 강을 사이에 두고 줄을 당기는 사례가 현존하고 있다. <기지시줄다리기> 세계 줄다리기 자료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함께 등재된 필리핀에서는 벼를 수확한 후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제사와 축제가 벌어지는데 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가 줄다리기이다. 필리핀 홍두안 지역에서는 넝쿨, 볏짚, 나무묘목을 사용해 줄을 만들어 계곡물에 들어가서 줄을 당긴다." 물론 벼농사와 관련시켜 해석하고 있지만 광의의 줄다리기는 '줄자르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내가 '줄 자르기'에 관한 논문에서 밝혀두었지만 줄다리기의 맥락은 보다 더 근원적인 관념이나 철학 속에서 추적해야 할 놀이이자 의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힌두교 발 '우유바다 휘젓기'나 본 지면을 통해 이론화했던 '테이프컷팅' 이른바 '탯줄 자르기'의 심연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울산 마두희를 해양문화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은 줄다리기의 근원을 보다 깊게 하는 것이자 보다 깊고 넓은 줄다리기의 종다양성을 끄집어내는 의미이기도 하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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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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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이지리아문화원, 주재국 스포츠 애호가들 대상 씨름대회 성료주나이지리아한국문화원(원장 김창기)은 9.28(목) 주재국 주요 정부 부처의 태권도, 유도 등 스포츠 동호회를 초청, 추석맞이 씨름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동 씨름대회는 2021년 첫 시작에 이어, 3회째 개최하는 것으로 주재국에 한국의 대표 명절로 손꼽히는 추석의 의미와 문화를 소개하고, 한국의 전통 스포츠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씨름을 체험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기획되었다. 특히, 주재국 태권도, 유도 단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스포츠 단체를 문화원으로 초청하여 나이지리아의 스포츠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국의 씨름 스포츠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대회에 앞서 문화원은 심판 4인을 소집하여 사전교육을 하였으며, 참가자들에게 동영상 상영을 통해 다양한 기술과 규칙에 대한 시청각 교육을 실시하였다. 금년 경기는 총 32명이 참가하여 남녀 각각 2체급으로 나누어 토너먼트로 진행되었으며, 각 부문 우승자들에게는 한국 전통차, 화장품, 한국 과자세트 등 다양한 상품이 증정됐다. 참석자들은 한국의 전통 스포츠 씨름이 일본의 스모, 나이지리아 전통 레슬링과 다른 묘미가 있어 큰 흥미로움을 느끼면서, 올림픽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씨름은 보지 못해 생소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다양한 기술로 승패가 결정되는 매력적인 스포츠 같다고 전했다. 또한, 씨름이 나이지리아 레슬링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면서 나이지리아와 한국 사이에 더 많은 스포츠 교류가 있기를 희망하는 분위기였다. 김창기 문화원장은"씨름을 통해 주재국에 풍성하고 즐거운 우리 고유의 추석 문화를 전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나이지리아와 쌍방향으로 교류할 수 있는 다양한 스포츠 문화 활동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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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선 보인 오스트리아 빈 한국문화 페스티벌 성료올해 5월초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원한 주오스트리아한국문화원은 9월30일(토)부터 10월 1일(일)까지 빈 소재 문화공간 '아레나 빈(Arena Wien)'과 빈의 대표적 쇼핑가인 그라벤(Graben) 광장에서 문화원 개원 기념 추석맞이 한국문화 페스티벌 'Inspire me Korea Chuseok - Das Herbstfestival'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10~20대 한류 팬층은 물론 그동안 한국문화 접촉 기회가 적었던 가족 단위 및 노년층까지 아우르는 축제형 행사로 기획된 이번 행사에서는 약 1만 명의 빈 시민들이 차례, 케이팝 공연, 한식, 전통놀이, 케이뷰티 등 다채로운 한국문화와 한류 콘텐츠를 직접 보고 즐기며 경험했다. 9월30일(토) 그라벤 광장에서 오스트리아의 젊은 케이팝 댄스그룹들의 케이팝 커버댄스 공연으로 시작된 케이팝 퍼포먼스는 케이팝 팬들과 댄서들 약 100명이 참여한 랜덤플레이댄스(Radom play dance ; 무작위로 흘러나오는 케이팝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참여해 춤을 추는 놀이)로 흥을 돋우며 행인들과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어서 유럽 각국에서 댄스대회는 물론 방송 출연을 통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보여 주목받아 온 댄스그룹 '아트지'가 역동적인 K- 댄스 공연을 펼치며 관객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10월1일(일) 빈 문화공간 '아레나 빈'에서 이어진 행사는 입장을 기다리는 시민들 약 2천 명이 한꺼번에 몰려 수백 미터의 긴 줄이 만들어질 정도로 빈 시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추석을 맞아 우리 차례 의식을 현지어 설명과 함께 선보이는 이벤트에 이어 야외 행사장 곳곳에서는 윷놀이, 제기차기, 투호, 딱지치기 등 우리나라 전통놀이를 직접 배우고 경연할 수 있는 놀이경연장이 펼쳐졌다. 한편, 야외 행사장과 접해있는 실내 공연장에서는 우리음악과 댄스의 정수를 담은 공연을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케이팝 커버댄스 그룹과 '아트지'의 댄스 공연에 이어 재즈에 국악 선율을 더해 해외 팬들까지 사로잡고 있는 신박서클이 우리만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퓨전국악 사운드를 연주했다. 그리고 최근 디지털 싱글 '키드'를 발매하고 월드투어에 오르며 국내는 물론 북미와 유럽에서 K-인디음악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새소년이 대망의 축제 마무리를 장식했다. 행사장 곳곳에는 방문객들이 점심부터 늦은 저녁까지 불고기, 떡볶이 등 우리 한식을 먹어보고, 한복을 직접 입어보고, K-뷰티 화장품을 구입했다. 올해 5월초 문을 연 주오스트리아한국문화원은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 문화 종합 쇼 윈도우로서 문화원을 오스트리아인들에게 각인하는 홍보효과를 성공적으로 거둔 것으로 평가했다. 양일간 이어진 행사에 빈 시민 약 1만 명이 방문했으며, 유튜브 홍보영상 조회수 또한 총 60만 회에 달했다. 임진홍 주오스트리아한국문화원장은 "이번 페스티벌은 대상 고객이 주로 10~20대 한류 팬층에 국한됐던 그동안의 한류행사에서 벗어나 아동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의 오스트리아인들이 부담 없이 즐기고 볼 수 있는 축제로 기획했다"며 이번 행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번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반으로 연례화를 추진해 오스트리아 대표 한국문화축제이자 빈의 명물 지역축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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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사할린 영주귀국동포 고향바라보기 개최5일 오전 오두산 통일전망대 망배단에서 대한적십자사 파주지구협의회 주최로 이루어진 2023 파주시자원봉사센터 우수프로그램 "제17회 사할린 영주귀국동포 고향 바라보기"행사 진행 중이다. 10여 년 전 사할린에서 이주하여 파주와 안산, 인천 등에서 영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 200여 명이 참석하여 북한 땅에 있는 고향을 향해 추석차례 겸 망향제를 올리고 있다. 제를 마치고 모처럼 나들이 나온 동포들이 다함께 모여 즐겁게 식사면서 정을 나누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된 우리 동포들을 고국의 품으로 모셔와 지원하고 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의해 러시아 남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된 조선인 15만여 명. 이중 10만여 명은 1944년 일본 규슈 탄광으로 끌려가 다시 이중징용을 당했다. 사할린 강제이주자들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일본인들의 폭행에 시달리며 노동착취를 당했으며, 일본의 패망 후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후 한러수교후 1990년초부터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89년 대한적십자사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남한(한국)국적을 취득, 한국 동포들이 남은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속적인 방문 지원 사업을 실시, 가족들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오고싶은 조국땅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일본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우리 동포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우리 동포들을 보호해주는 기관도 없었다. 이제 러시아 기밀문서 해제로 그런 자료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현재 사할린 동포들의 강제징용 된 숫자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는 사할린 한인들의 기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국가 차원의 추모비나 위령비 하나 없는 것이 서글프다." 이어서 "오늘 이곳은 사할린에서 강제 이주 되어 살다가 북한 선전정책에 속아서 북으로 넘어간 가족들을 그리우면 와서 바라만 보는, 이제는 북에서 돌아가신 부모형제들을 기리는 장소가 되었다. 멀리 북한땅을 바라보며 오늘 이렇게 모여서 우리가 제례를 올리고 있다" 며 "평생 러시아에서 국적없이 살다가 북한 땅에 가서 통일이 되면 남쪽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북한으로 가신 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제는 생사도 확인이 안되고 세월이 흘러 북한 땅에서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며 매년 추석을 맞이하여 제례를 올리고 있다. 어서 남북통일이 되어 상봉하는 날을 기다리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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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안나의 첫번째 한국문화 여행안녕하세요. 저는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좋아하는 러시아인 안나 니젤스카야라고 해요. 최근 20일간 한국 여행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와서 가을학기 수업을 시작하고 있어요. 오늘 29일 한국 방송을 보니 추석날 둥근달이 떴어요. 벌써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보고싶어요. 제가 한국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관심이 생겼나요? 일단은 제가 원래 외국문화,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어요. 제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쩌다가 2011년 "꽃보다 남자"라는 한국드라마를 우연히 보게 됐어요. 그건 그거고 우연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딱 그때부터 아름다운 한국세상의 문이 열렸어요. 점점 한국 영화나 드라마도 보고 음악도 들을수록 한국말에도 깊이 빠졌어요. 제 귀에 딱 맞는 한국어는 매력적인 음악소리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듣고 싶어졌고 어느 날 제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어 왔어요. "와,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어 소리를 직접 발음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한국 전통악기가 있는 국악박물관에 가고 싶었어요. 악기를 직접 보고 싶었어요. 특히 당시 저는 가야금 소리에 깊이 빠졌어요. 그래서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혼자서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님 안내로 국립국악원에서 판소리 창극 '토끼전' 이야기가 담긴 '토별가'를 보게 되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노래를 아주 신나게 부른다는 것, 무대와 관객이 주고 받는 '잘한다' 라는 응원소리에는 에너지가 넘졌어요. 저는 나도 모르게 '브라보'라고 외쳤어요. 국립국악원 수장이신 김영운 원장님이 사진도 같이 찍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저에게는 아주 큰 감동입니다. 저는 모국어 러시아어 외에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 그리스어, 총 7개 국어를 구사하는데, 그 중에서 한국어 발음을 듣고 감동을 받았어요. 제가 들어본 언어 중 가장 아름다운 성음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얼른 한국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시작했어요. 처음엔 직접 한글도 배웠고 글쓰는 방법하고 읽는 방법도 배웠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고급 언어을 구사하기에는 부족했어요. 그래서 한국어를 깊이 배우려고 2013년에 모스크바에 있는 원광한국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때는 원광한국학교였고 지금은 세종학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3년반 동안 일요일마다 학교에서 한국어수업을 받기 위해 시간을 내서 다녔어요. 중요한 것은, 그때 저는 생물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어요.세종학당에 다녔을때 공부를 많이 하고, 친구도 많이 만나게 되고 TOPIC 한국어 시험에서 2급을 받고 한국어말하기대회에 참가까지 했어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대학생이라 2017년에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됐어요. 졸업 논문을 써야 했고 아쉽게도 한국어는 그만 배우게 됐어요.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졸업하고 나서 생활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됐어요. 한국어와 한국문화와 거리가 멀어졌는데 한국말을 잊지 않도록 가끔 한국 영화도 보고 한국 트롯트 음악도 듣고 있었어요. 어느날 한국어 시낭송대회에도 참가했어요. 김재진의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는 시를 낭송하고 3등을 했어요. 오랫동안 한국어 연습 안했던 사람으로서 너무나 기뻤어요." 2022년 가을부터 그리스 아테네 대학교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게 되고, 2023년 9월에는 꿈에도 그리워하는 한국으로 드디어 저의 첫번째 한국여행을 왔습니다. 첫째 이유는 한국 드라마 사극에서 듣던 가야금 소리에 반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소원을 풀었습니다. 올해 1월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님을 통해 (주)국악신문사에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드렸습니다. 한복을 처음 입어보고 가야금이라는 전통악기를 만져보고 줄도 튕겨보았어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혹한 소리였습니다.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이혜솔 선생님이 한복을 선물로 맞추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파티에 입고 나갈려고 잘 걸어놓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에서는 한복을 보기는 쉽지 않아서 특별한 의상이 될것 같습니다.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이 저에서 가야금을 선물로 주셨는데. 다음 한국에서 배우기 위해 국악신문사에 맡겨 두고 왔습니다. 언제 다시 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늘 SNS를 통해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세계인이 사랑하는 '한류'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이번 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었어요. 한국과 러시아와 깊이 관계된 상징적 인물이 안중근의사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공부를 좀 더 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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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의 집, '제4회 곽동현의 서도소리' 발표회6일 오후 7시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곽동현(1981년생,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 한양대 겸임교수)이 '제4회 곽동현의 서도소리'를 발표한다. '지금'이라는 주제로 80분 동안 발표회를 개최한다. 전석초대로 무료공연이다. 전국을 대표하는 젊은 남창 소리꾼을 들자면 '경기민요'에 이희문을 들수 있고, '경서도소리' 부문에서 곽동현은 독보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작년 서도소리발표회에서는 서도소리의 백미 '수심가'의 애절한 선율을 남창의 목소리로 내지를 수 있는 꿋꿋한 절제미를 투명하게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관객들에게 여창이 부르는 서도소리와 남창이 부르는 서도소리의 경계를 자연스레 느끼게 해주었다. 이번 발표회는 서도송서, 서도잡가, 서도재담, 서도민요을 중심으로 엮어진다. 곽동현은 "서도송서 적벽부, 시창(詩唱)과 비슷한 '관산융마'(關山戎馬)를 비롯한 배따라기, 서도소리의 진수를 밝히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서도소리에 숨겨져 있는 '서도송서 '적벽부', '축원경', '파경'은 그동안 무대화 작업이 희박한 서도소리 중 하나이다. 4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 명절이 되어도 만나지 못한 정이 그립고, '지금'이라는 주제와 잘 맞을 것 같아서 '시대의 노래'로 '축원경'과 '파경'을 소환했다."라고 설명했다. 다음 사설을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축원덕담경' 아들을 낳면 효자낳고 딸을 낳으면 열녀낳고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일가문중에 화목동이 형제에는 우애동이 친구에는 유신동이 둥글둥글 수박동이 부채살에 화락동이 (같이)세상천지 으뜸동아 동방삭에 명을 빌고 강태공에 나이를 빌어 '파경' 일쇄동방선도경(一灑東方潔道場) 이쇄남방에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삼산반락은 청천외(三山半落靑天外)요 이수중분능라도(二水中分綾羅島)라 능라도(綾羅島)며 을밀대(乙密臺)요 을밀대면 만폭대(萬瀑臺)라 그는 사설을 읊으며, 이번 추석에는 화목한 가족들과 친구들을 고향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축원경은 잘 불려지지 않는 소리지만 우리 모두에게 축원을 드리는 마음을 담아 정성을 다해서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라고 고개를 숙였다. 파경은 이 세상을 잠시 멈추게 한 코로나 기운을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물리치자(깨버리자)는 마음으로 택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그래서 주제가 '지금'이라고 한다. 이번 무대의 구성 및 예술감독을 맡은 그는 "2019년 '곽동현의 경서도잡가1'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하였다. 독창회를 준비할 때마다 매번 부족함을 느끼지만 막상 끝내고 나면 희미하게만 보이던 제 소리의 행로가 선명해질 것이다."라고 당찬 각오를 보였다.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서도지역)에서 전승되던 민요나 잡가 등을 말하며, 서도소리는 평안도 민요와 황해도 민요, 서도잡가, 한시를 읊은 시창(詩唱)과 극적 구성을 띠고 있는 배뱅이굿이 있다. 평안도 민요에는 수심가, 엮음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안주애원성 등이 있는데, 조선 전기부터 서도지방 사람들의 벼슬길이 막히자 그 설움을 푸념으로 읊은 '수심가'가 가장 유명하다. 그래서 서도소리의 가락은 흔히 수심가토리라고 불린다. 조금은 구슬프지만 투명하고 절제있는 청명한 소리가 압권이다. 이번 무대에서 불려지는 젊은 남창 소리꾼이 어떤 목소리에 어떤 정서가 담긴 서도소리의 멋을 전달해줄 것인지 기대가 된다. 한양대에서 '영남지방 유희요 연구'로 박사를 받은 곽동현은 일찌기 12세부터 '영남민요'와 '경기소리'를 정은하(아리랑 명인) 선생에게 사사하고, 한예종에서는 이호연(경기소리 보유자) 선생에게 경기민요를 사사했다. 이후 한양대에서 유지숙(서도소리 전수조교)선생과 김광숙(서도소리 보유자)에게 서도소리를 사사했다. 곽동현이 리더로 운영되고 있는 국악아카펠라 그룹 '토리스' 는 2012년 러시아 사할린 주정부 문화교육국의 주최로 개최된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인형극장에서 열린 ‘제4회 전통음악 국제콩쿠르’ 대상을 비롯한 국악계 큰 상을 받아왔다. 창작과 작곡을 통해 전통민요를 국내외에 널리 알려왔다. 이번 무대 첫막은 서도송서 '적벽부'로 막을 연다. 반주에는 가야금 조요인, 대금 심성욱, 피리 박새한, 해금 원유빈, 장구 이지안이 함께한다. 1. 서도송서 '적벽부' <적벽부>는 서도 송서로 경기 송서로도 다 불린다.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소동파(1036~1101)가 1082년 귀양을 가서 쓴 <적벽부>에서 유래한다. 내용은 소동파가 벗(양세창)과 술잔을 기울이며 뱃놀이를 하면서 조조의 대군과 오나라의 대군이 일전을 겨룬 적벽대전을 회상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2. 서도잡가 '제전' <제전>은 북망산에 묻힌 임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드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읊은 노래이다. 첫때 대목은 제물 꼬이는 법을 풀이하고, 둘째 대목에서는 제상에 차려진 산해진미의 이름을 든 다음 초헌·아헌·종헌의 절차를 그리고, 셋째 대목에서는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맺고 있다. 3. 서도잡가 '관동팔경' <관동팔경>은 국악예술학교 교장을 지낸 박헌봉이 작사를 하고 이창배가 곡을 붙였다고 한다. 관동팔경은 대관령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동해안을 따라 바닷가 경치를 대표하는 여덟 군데의 명승지이다. 관동팔경은 간성의 청간정, 강릉의 경포대, 고성의 삼일포 삼척의 죽서루, 양양의 낙산사, 울진의 망양정, 통천의 총석정, 평해의 월송정 등이다. 4. 서도민요 '날 찾네' <날찾네>는 서도좌창으로 분류할 수도 있고 서도민요로도 분류할 수 있다. 다른 서도좌창의 특징과 같이 수심가조로 마뮤리를 하는 것이 특색이다. 즉 민요와 좌창의 중간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겠다. 5. 서도소리 '축원경&파경'(소리 곽동현, 소리 최윤영, 소리 전병훈) `이 소리는 맹인들이 돈을 벌기위해 부르는 것으로 오래살고 행복하고 돈을 많이 벌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안이 잘 되라고 덕담으로 축원하는 풍자적인 노래이다. <파경>은 경을 끝낸다는 말이다. 복을 빌고 난 다음 여러 잡귀를 쫓는다는 내용이다. 6. 서도잡가 '배따라기' 현재 서도창에서 불려지는 <배따라기>는 평안도 영유지방(지금의 평원군)에서 뱃사람의 무사를 기원하는 굿에서 시작하여 많은 변형을 가져온 것이다. 내용은 뱃사람이 풍랑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살아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배따라기>는 굿에서 왔을 것이나 전문창자에 의해 좌창으로 변형되어 계승되고 있다. 7. 서도민요 '산염불', '잦은염불' 산염불은 <긴염불>이라고도 하며 <해주 산염불>이라고도 한다. 황해도에서 발전한 것이다. 염불이라는 말이 들어가 곧 불가를 연상하게 되나, 실제 사설이나 음악 내용은 불교와 관계가 없다. <산염불>은 무속에서 행해졌던 것이나 민요형식으로 된 <산염불>은 점차 전문 예능인들의 음악행위와 어법이 더해져서 전문성을 띠는 소리가 되었다. 8. 서도민요 '느리개타령','금드렁타령','어랑타령','궁초댕기' <느리개타령>은 황해도민요로 봄의 아름다움을 담은 소박한 내용이다. 이어 황해도 지방의 신민요인 금드렁타령과 함경도지방의 신민요인 어랑타령과 궁초댕기를 이어서 부른다. 어랑타령은 신문물의 도래와 관련해 전통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한 사회 현상을 노래로 잘 담고 있으며, 궁초댕기는 급속한 개화의 바람과 시대적 변화속에서도 순전한 사랑을 다짐하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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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맞이, 국립민속박물관, '보름달이 떴습니다'국립박물관에서 가족과 함께 무형유산을 즐기는 행사와 공연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28일과 30일, 10월 1일 등 사흘간 추석 관련 세시풍속을 소개하는 한마당 행사 '보름달이 떴습니다'를 진행한다. 우리 가족 보름달과 함께 찰칵!', '우리 가족 보자기 만들기', '내 추억에 놀라와' 등 다양한 체험이 있다.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공연과 세시 체험도 있다. 영덕 월월이청청(경상북도무형문화재), 평택농악(국가무형문화재), 거창삼베길쌈(경상남도무형문화재) 시연과 물레로 천을 짜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한가위배 K-씨름대회'도 열린다.어린이박물관에서는 '어린이 가을걷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첫 수확한 벼로 만든 오려송편도 빚을 수 있다. 영덕 월월이청청(경상북도무형문화재), 평택농악(국가무형문화재), 거창삼베길쌈(경상남도무형문화재) 시연과 물레로 천을 짜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한가위배 K-씨름대회'도 열린다. 세시풍속을 놀이로도 즐길 수 있다. 강강술래 챌린지, 보름달 풍선 놀이터, 추석빔 포토존, 소놀이, 짚풀공예 등 다채로운 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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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한가위, '심청가’의 색다른 전통이 살린 창극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고전소설 중 하나인 효녀 심청전 스토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심청전 판소리는 시대를 넘나들며 대중에게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아 4년 만에 돌아온 판소리의 멋과 맛을 오이 담은 창극 ‘심청가’가 왔다. 손진책 연출과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맡아서 완성한 창극으로 격조 높은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과 무대 미학이 조화를 이루어 작품성이 극대화했다는 호평받은 작품이다. 판소리 ‘심청가’의 스토리 기본 틀위에 신선한 충격을 가미했다. 늙은 심봉사가 아닌 젊고 기운 넘치는 아버지와 계모 뺑덕어멈이 펼치는 익살 넘치는 내용들이 관객들에게 에너지를 발산해 준다. 5시간이 넘는 전체 내용 중 핵심을 추려 2시간 여의 창극으로 재구성했다. 판소리의 주요 대목을 배치하면서도 일부 대목은 합창으로 변형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이번 무대에서 판소리와 가장 다른 매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합창이다. 35명의 출연진이 서양의 오페라 못지않은 웅장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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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관람객 700만명 돌파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을 찾은 관람객 수가 추석 명절인 29일 700만 명을 돌파했다.재단법인 순천만정원박람회조직위원회(이사장 노관규·순천시장)는 29일 오후 4시 22분께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입장객 수가 700만 관람객을 돌파했다고 30일 밝혔다. 목표 관람객 수로 정한 800만 명 입장객은 이제 1000명을 남겨두고 있다.조직위에 따르면 정원박람회장은 28일까지 689만 4218명이 다녀갔으며, 추석인 29일 19만1140명이 정원박람회장을 찾았다.누적 관람객 수가 708만 5358명으로 목표 관람객 800만 명 대비 88.57%에 도달했다.202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지난 6월 23일 500만 관람객 돌파 이후 2달여 만에 600만 관람객을 넘어섰다. 지난 22일 목표 관람객인 800만 명의 82%에 해당하는 650여만 명이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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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올 추석에는/이정원가을빛으로 채색된 하늘 소슬바람에 그리움 움실거려 무심한 추억 머릿속을 어루만진다 천고마비 애처로운 마음 휘영청 보름달을 기다리는 걸까 가을빛이 흥겨워 덩실거린다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가 왠지 모를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은 아련한 세월이 태연스레 웃는다 알곡이 토실토실 영글어가듯 풍성한 마음도 무르익어 가는 결실의 행복을 간절히 소망한다 두터운 정 나누며 웃음꽃 피워내는 한가위 추석을 고대하는 가을은 붉은 단풍을 그리워하며 흘러간다. 추천인:박미현(국악 애호가) "코로나가 지나고 맞이하는 올해 추석은 풍성하다. 사람들이 고향길 찾아서 이동을 할 수 있고, 얼마나 다행인가. 둥글런 달밤 아래 우는 풀벌레도 내 편이 되어 줄 것만 같은 추석이다. 우리 애들에게 내년에도 이런 풍성한 추석날만 되기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바란다(加也勿 減也勿 但願長似嘉俳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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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야행·퓨전국악 등, 연희한마당경기도는 오는 28일부터 다음 달 3일 추석연휴기간 세계유산 남한산성 행궁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24일 밝혔다.오는 11월 5일까지 매 주말 ‘전통문화체험’, ‘숲생태학교’, ‘연희한마당’을 주제로 ‘2023년 세계유산 남한산성 역사문화 명소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전통문화체험도 있다. ▲조선시대 복식을 입고 행궁을 거닐어 보는 '복식체험' ▲조선시대의 수묵화를 그려보는 '모두의 조선화'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고 장원급제도 해보는 '남한산성 별시' ▲다도예절을 배우며 차와 다식을 시식하는 '다담' 등이다.숲생태학교는 숲해설 전문가와 함께 가을 숲속을 산책하며 나무와 꽃에 대해 알아보는 체험, 산성에서 볼 수 있는 동식물을 컬러링북을 활용해 알아보고 솔방울 팔찌·낙엽다발 만들기 체험으로 이뤄진다.연희한마당은 ▲전통의 기운을 담은 무예를 만나보는 '전통무예 시연' ▲신명나는 춤과 소리의 무형유산 '농악단 공연' ▲발라드, 퓨전국악, 어쿠스틱 등 다양한 음악의 선율을 만나는 '버스킹 공연' ▲명사를 통해 인식과 시야의 폭을 넓히는 '박금수 박사님과의 만남' 등이다.연휴 프로그램은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으며(일부 사전 예약 필요), 운영 시간은 프로그램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진행된다. 자세한 내용은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경기도 관계자는 "박물관·미술관·공연 관람 등 일부 유료로 운영되고 있으며, 추석 당일과 연휴기간 일부 휴관하는 시설이 있으므로 각 시설의 누리집과 앱을 사전에 찾아보고 관람료·주차료·방문이 가능한 일자 등을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을 권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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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국에서 한복입고 우리 추석 문화 함께아시아, 유럽, 미주, 아프리카의 재외 한국문화원에서 전 세계인들이 우리와 함께 추석의 의미를 새기고 한가위 문화를 즐긴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 해외문화홍보원[원장 김장호, 이하 해문홍(KOCIS)]은 21개국 24개 재외한국문화원·홍보관(이하 한국문화원)에서 다양한 추석 문화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먼저 아시아 지역에서는 주오사카한국문화원과 주도쿄한국문화원이 송편, 전 등 추석 음식 요리 교실을 개최한다. 두 문화원의 요리 수업 모두 정원의 6배가 넘는 인원이 참여를 희망해 한국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베트남한국문화원은 현지 중학교 한국어반 학생을 초청해 송편 빚기와 강강술래, 투호·버나돌리기 등 민속놀이 체험, 한복 입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주인도네시아한국문화원은 한국이 올해 인도네시아 국제도서전의 주빈국인 만큼 한국문화를 더욱 잘 알릴 수 있도록 도서전과 연계한 추석 문화 체험행사를 마련했다. 주태국한국문화원은 방콕 인근의 취약계층 거주지를 찾아 송편 나눔, 떡메치기 등 지역사회와 함께 한가위 전통문화를 나누는 뜻깊은 행사를 기획했다. 미주 지역에서는 ▴주캐나다한국문화원과 주멕시코한국문화원이 차례상 등 추석 문화를 소개하고 송편과 모둠전을 시식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주워싱턴한국문화원은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과 함께 강강술래, 판소리, 모듬북, 사물놀이 등 전통 공연과, 한글 이름 멋 글씨(캘리그래피) 교실 등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특별행사를 마련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주나이지리아한국문화원이 주재국 요리사들을 초청해 모둠전과 소고기뭇국 등 한가위 명절 음식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고, 주재 국민을 대상으로 추석이 한국인들에게 지닌 의미와 문화를 소개하고 영화 <가족>을 함께 관람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또, 추석맞이 씨름대회를 열어 2024년 파리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나이지리아 태권도 선수들을 초청, 한국 민속놀이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씨름을 소개한다. 유럽 지역에서는 한가위를 계기로 우리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이어진다. 주프랑스한국문화원은 프랑스한인회 등 관련 단체와 함께 ‘2023 한가위 축제’를 개최하고, 현지 교민과 프랑스인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도록 한가위 문화체험뿐 아니라 전통음악 공연, 태권도 시범, 케이팝 콘서트 등을 진행한다. 주헝가리한국문화원은 헝가리 중앙은행과 함께 추석 명절의 의미를 소개하고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한다. 주벨기에유럽연합한국문화원은 윤나라 막걸리 전문가와 알베르토 카르도소(Alberto Cardoso) 벨기에 맥주 전문가를 초청해 한·벨 양국의 전통 발효주를 비교, 소개하고, 이들을 직접 만들어 시음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한국영화제’ 개막 리셉션(9. 27.)에서는 현지 문화·외교계 인사와 언론인을 초청해 한가위 음식을 나누고, 사찰음식 명장인 정관 스님을 모셔 현지 요리관계자, 일반인들과 함께 장을 담근다. 해문홍(KOCIS) 김장호 원장은 "오곡이 익는 계절, 달이 유난히 밝은 한가위는 가족과 이웃 간 정을 느끼고,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는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이다. 세계 각국의 재외한국문화원에서 추석을 맞이해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식과 공연, 전통놀이 등을 정성스레 준비했다.”라며, "현지인들과 재외동포들이 함께 풍성한 한가위의 의미를 새기고, 한국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체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재외한국문화원·문화홍보관 추석맞이 행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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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원, 추석맞이 전시체험행사 ‘시시때때 세시풍속’ 개최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하는 추석맞이 전시체험행사 ‘시시때때 세시풍속’이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주말 양일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 내 야외 놀이마당에서 개최된다.‘시시때때 세시풍속’ 전시체험행사는 공진원에서 추진하는 ‘세시풍속 맥잇기’ 사업의 하나로, 잊혀가는 세시풍속을 재발견하고 일상에서 다시 즐길 수 있게 하고자 개최된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책 ‘매일매일 세시풍속’(고성배 펴냄, 닷텍스트)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 전시와 세시풍속 관련 체험행사가 진행된다.전시는 대한민국 각지의 세시풍속을 사계절의 절기마다 체험할 수 있는 24개의 세시풍속을 다루며, 그림을 활용해 우리가 모르던 세시풍속에 진행되는 놀이, 음식, 의례 등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구성했다.체험행사는 양주소놀이굿보존회와 함께 소 모양을 가장해 놀이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풍년을 부르는 소 놀이, 공예가 최석봉 장인이 알려주는 △풍년을 엮는 짚풀공예 체험, 세시풍속에 대한 지식을 퀴즈로 풀어보는 △세시 왕 선발대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추석빔을 입고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시시때때 포토존, 추석에 경험한 세시풍속 추억을 적어보는 △시시때때 추억남기기 등 참여 이벤트도 함께 준비됐다.올해 상반기에는 단오를 주제로 행사가 진행됐으며, 하반기에는 추석을 주제로 진행된다. 상반기에는 6월 단오를 주제로 고양어린이박물관과 협력해 ‘시시때때 세시풍속’행사를 진행했다. 어린이 단체 및 가족 관람객을 포함해 다양한 관람객이 참여하며 행사 기간인 총 6일간 1345명이 행사를 방문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이번 하반기 세시풍속 행사는 공진원에서 조성한 ‘우리놀이터-서울’[1]이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과 협업을 통해 진행되며, 참가자들은 ‘시시때때 세시풍속’전시체험행사 외에도 국립민속박물관의 다채로운 추석 행사도 함께 즐길 수 있다.공진원 전통생활문화본부 김태완 본부장은 "추석을 맞아 소놀이, 짚풀공예체험, 세시왕 선발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많은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게 구성했다”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세시풍속인 추석과 관련된 전통문화 체험행사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일상의 전통생활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일부 프로그램은 현장 접수를 통해 체험할 수 있으며, 자세한 정보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누리집 및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확인할 수 있다.'우리놀이터'는 전통놀이 현대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전용 문화공간이다. △경기도 고양시 고양어린이박물관 △경기도 양주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경기도 파주시 국립민속박물관 △경주시 경주엑스포대공원 △서울시 국립민속박물관 △전주시 우리놀이터 마루달 등 전국 총 6곳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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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조선시대 ‘추석이 왔어요" 28일한국민속촌이 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아 ‘추석이 왔어요’ 행사를 9월 28일(목)부터 10월 3일(화)까지 추석 주간 동안 진행한다. 한국의 전통과 풍속을 그대로 간직한 ‘추석이 왔어요’ 행사는 전시 6종, 체험 4종, 시연 3종 등을 통해 다채로운 전통문화의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한국민속촌은 이번 추석 행사에서 민속마을 본연의 공간 정체성을 살리고, 전시가옥의 생동감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전시체험 형태를 시도했다. 한국민속촌 전시가옥 소속 직원들이 조선사람으로 변신한다. 가옥마다 상주하는 직원들은 체험 및 전시 콘셉트에 맞춰 마을의 추석 풍경을 보여준다.민속마을 9호 남부지방대가에서는 대감이 직접 송편 빚는 방법을 알려주고 송편 나눔을 진행할 예정이다. △진사댁의 차례상 △물레댁의 솜실 △흥선생의 죽책 등 각 가옥마다 색다른 콘텐츠들이 준비됐다. 주인 역할을 맡은 관리자들이 가옥에 상주하며 전시와 체험을 진행해 관람객들은 전통생활에 몰입할 수 있다.민속마을 옹기공방 앞 너와집에서는 영상전시를 새롭게 시작한다. △김선비의 유식 콘텐츠는 한국민속촌 학예사가 추석과 관련해 직접 작성한 시, 문구, 수필 등을 진열해두고 과거 우리의 추석 풍경을 실감 나는 영상으로 연출했다.추석 당일에는 한 집의 성주신에게 햅쌀을 올리며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민족의식 △성주고사를 진행한다. 목교에서 길놀이 공연을 시작으로 민속마을 22호로 이동해 마당굿과 고사를 올린다. 일부 관람객은 직접 고사를 체험해 볼 수 있어 추석의 감사와 평안을 함께 나눌 수 있다.이외에도 허수아비와 쇠통이 설치된 시골들판에서 풍년을 위해 농악을 직접 쳐볼 수 있는 공간 △하포수의 시골들판, 지역별 차례상을 차려보는 체험 △진사댁의 차례상, 가마솥에 밥짓기 과정을 보고 절구질을 체험할 수 있는 △심부자의 올벼 등이 준비됐다.이번 추석 행사를 기획한 한국민속촌 나형남 학예사는 "조선시대 일상생활에 몰입할 수 있는 생생한 전시를 기획했다”며 "생생한 세시풍속을 재현한 만큼 우리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분들에게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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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2023 추석공연, "북청사자놀음' '흥보가' 등"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9월 28일 목요일 오후 3시,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2023 추석공연 '중추가절'을 개최한다. '중추가절'은 세시풍속의 의미를 되새기며 전통공연 예술을 통해 가족들이 함께 즐거운 명절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기획공연이다. 이번 공연에는 전통타악그룹 천공의 무대로 문굿과 길놀이, 북청사자놀음, 버나놀이, 웃다리 농악 등 신명나는 전통공연이 펼쳐진다. 또한 국악연주단의 강강술래, 단막극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 남도민요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공연 시작 2시간 전부터는공연장앞마당에서 가족 단위 관객들을 위해 즐거운 명절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체험을 통해 간단한 간식 제공과 경품 추첨에 응모할 수 있다. 공연문의는 전화(063-620-2329) 또는 국립민속국악원 카카오톡 채널 누리을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추석공연은 전 연령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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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추석 명절 공연 ‘달놀이’ 개최국립부산국악원(원장 이정엽)이 오는 29일 명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추석 명절 공연 ‘달놀이’를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 ‘달놀이’는 풍요롭고 즐거운 우리 명절 추석 공연으로 고향을 찾은 이들과 또는 고향에 가지 못한 이웃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전통예술공연이다. 이날 행사는 추석의 의미를 되새기고 흥겨운 마을 잔치를 통해 넉넉한 한가위의 기쁨을 다 함께 나누고자 마련됐다. 다양한 국악으로 구성된 이번 무대는 국립부산국악원 국악연주단 기악단, 성악단, 무용단이 모두 출연하는 가·무·악 종합 무대로 신명나는 국악의 진수를 선보인다. 관람객들의 흥과 이해를 돕기 위해 남원의 유명 소리꾼 강길원(국립민속국악원 창극단 단원)의 사회가 더해진다. 마을 잔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이번 공연은 태평소 가락과 기악합주의 ‘호적풍류’로 잔치의 문을 활짝 열고 추석과 관련된 ‘경기·남도민요’와 익살과 해학을 담은 코믹송 장르인 ‘만요’가 흥을 더한다.다음으로 마을 잔치의 하이라이트인 관객과 함께하는 관객 장기자랑 시간이 펼쳐진다. 이후 영남북춤 놀이 ‘영고(嶺鼓)놀이’로 마을잔치의 대미를 장식한다.공연 관람은 36개월 이상이다. 사전예매는 국립부산국악원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전화로 예매할 수 있다.또한 공연 당일 한복을 착용하고 오는 경우 관람료가 할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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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 기획공연 ‘판소리춘향가’ 개최대전문화재단(대표이사 백춘희)이 운영하는 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는 오는 23일, 2023 전수회관 기획공연 4회차 ‘대전무형문화재 판소리춘향가’를 진행한다. 대전무형문화재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고향임을 비롯한 이수자, 전수자들이 펼치는 이번 공연은 강강술래, 금강산타령 등 4개의 남도민요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초패왕의 이야가를 다룬 단가, 판소리 다섯마당 중 심청가와 적벽가의 한 대목과 판소리춘향가 중 대표 대목인 사랑가, 쑥대머리, 이별가, 후일담 등 총 11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대전무형문화재 판소리춘향가 보유자 윤초 고향임은 오정숙 명창을 사사,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차지하며 대전 전통예술의 맥을 잇고 위상을 높이고 있는 지역 대표 예술인이다. 우리 소리의 특징인 풍성한 성량, 정확한 성음으로 구사하는 국악 공연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대전문화재단 백춘희 대표이사는"대전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들려주는 판소리, 우리 명절 추석을 느낄 수 있는 강강술래 등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공연 감상의 기회를 많은 시민들이 누릴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2023 전수회관 기획공연은 10월 판소리고법, 11월 입춤까지 대전무형문화재 예능종목을 중심으로 무료 진행되며 공연에 대한 상세정보는 대전문화재단 누리집과 대전문화재단 전통진흥팀(042-632-8381)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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